지난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식장에서 울려 퍼진 노래 하나가 새삼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문제의 작품은 바로 '감격시대'. 텔레비전 광고 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친숙한 데에다 경쾌하고 힘찬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이므로, 기념식을 준비하는 쪽에서는 나름대로 자리에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선곡을 했을 테지만, 결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일제시대에 발표된 어용 친일가요를 연주할 수 있느냐는 일부 논자들의 문제 제기가 언론을 달구면서, '감격시대'는 난데없이 친일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감격시대' 같은 노래가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민중의 활달한 정서 소통에 도움을 주었다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니, 같은 작품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가 양극으로 치닫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감격시대'는 과연 친일인가, 아닌가. 올바른 평가는 정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해야 하므로 우선 '감격시대' 작품 자체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다
미풍은 속삭인다 불타는 눈동자
불러라 불러라 불러라 거리의 사랑아
휘파람 불며 가자 내일의 청춘아
바다는 부른다 정열이 넘치는 청춘의 바다여 깃발은 펄렁펄렁 바람에 좋구나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바다의 사랑아 희망봉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로
잔디는 부른다 꽃 향기 감도는 희망의 대지여 새파란 지평 천리 백마야 달려라 갈거나 갈거나 갈거나 갈거나 잔디의 사랑아 저 언덕 넘어 간다 꽃길로 마을로
< 감격시대 : 남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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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시대' 광고 - 오케 임시발매 걸작반 |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1939년 4월에 오케레코드에서 남인수의 노래로 발표된 '감격시대' 가사를 보면,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 누구도 친일을 운운할 꼬투리를 잡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연상케 하는 낱말은 단 하나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어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소 흠일 수는 있어도, 일단은 청춘을 구가하는 특별할 것 없는 유행가로 보아야 한다.
한 가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가사 전체 분위기가 어떤 대상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인데, 그 대상이 과연 무엇인지는 결국 해석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감격시대'의 친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지향성의 정체가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부응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그 반대의 평가를 내리는 이들은 오히려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해석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원래 의도가 어떠한지는 결국 작가만이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에게 그 의도를 확인할 길도 없다. 그렇다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정황을 살피는 것이 현재로서는 그나마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는 평가 방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감격시대'와 같은 음반에 수록된 '달 없는 항로'(김용호 작사, 엄재권 작곡, 이난영 노래)를 보면, 이 역시 전혀 친일 혐의와는 무관한 곡임을 알 수 있다. '감격시대'가 발표된 시점 전후인 1939년 상반기에 오케레코드에서 발표된 곡들을 살펴 보아도, 이화자의 '어머님전상백', 김정구의 '세상은 요지경' 같은 곡들이 보일 뿐이며 친일 혐의가 있는 곡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같은 시기 다른 음반회사에서 발표된 작품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1939년 상반기에 각 음반회사에서 발표한 200여 곡의 유행가에서 친일 혐의가 있는 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무렵은 박향림의 '막간 아가씨',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 마라',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 같은 곡들이 크게 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이와 같은 당시 유행가계의 분위기 속에서 유독 '감격시대' 한 곡만이 친일적 의도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일제시대에 분명 친일적 유행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1937년 후반부터 1938년 초까지 중일전쟁 개시의 여파로 몇몇 친일유행가들이 발표되었고, 본격적인 친일유행가의 양산은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한편, 친일유행가의 또 다른 대표적 예로 거론되고 있는 '복지만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로 1941년 3월에 태평레코드에서 발표된 '복지만리'는 제목이 같은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달 실은 마차다 해 실은 마차다 청대콩 벌판 위에 휘파람을 불며 불며 저 언덕을 넘어 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 기층 대륙길에 어서 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
백마를 달리던 고구려 쌈터다 파묻힌 성터 위에 청노새는 간다 간다 저 고개을 넘어 서면 새 천지의 종이 운다 다함 없는 대륙길에 빨리 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
歌うたおうよ躍る黑馬よ 胸に鳴る鳴る血潮の嵐 空はむらさき淡雪のせて 明けゆく曠野の彼方へ走ろうじゃないか
< 복지만리 : 백년설 >
가사 3절이 일본어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1940년대 식민통치 압박의 강화 정도를 더욱 느낄 수는 있지만, 내용 자체는 노골적인 친일과 분명 거리가 있다. 만주 이민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은 물론 분명한 것이나, 이는 '복지만리'가 영화 주제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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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복지만리'는 전창근 감독의 데뷔작으로 영화에 민족적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감독은 10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음-편집자註, 사진자료-국립영상원 |
1941년 3월에 개봉된 영화 '복지만리'의 성격에 대해서도 일제 정책에 협력한 어용적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래도 민족적 색채 또한 있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 영화 줄거리는 결과적으로 만주 이민을 미화하고 장려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영화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이상 '복지만리' 가사에 담긴 메시지도 그에 어느 정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복지만리'의 위상은 계몽적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 수준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영화 '복지만리'가 이렇다 할 흥행 성적을 내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복지만리'는 음반 판매량 5만 장을 돌파하는(물론 태평레코드사의 광고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1940년대에 발표된 대부분의 노골적인 친일유행가들이 별 볼일 없는 판매고를 기록했던 것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 점이다.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영화의 주제가로서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당시 민중들은 그 한계 너머에 있는 노래 자체의 매력에 열광하여 '복지만리'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유행가의 불행한 유산으로 친일적인 작품은 분명 있지만, 그 친일을 평가하는 잣대가 막연한 추측이나 감정적인 비난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본격적인 친일유행가의 존재는 알지도 못한 채 엉뚱하게 '감격시대' 같은 곡에다 무리한 친일의 멍에를 덮어씌우는 일부 논자들의 태도는 어설픈 역사인식의 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복지만리'의 경우 일제 정책에 협력적인 영화의 주제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굳이 친일의 정도를 따져 볼 경우 '감격시대'와 달리 어느 정도 혐의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혈서지원'이니 '우리는 제국군인'이니 하는 것처럼 노골적인 친일유행가도 아닌데, 방송사에서 내부적으로 금지곡 리스트에 올리기까지 한 것은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의 결과로 보인다.
친일 여부는 분명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엄격히 평가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감격시대'와 '복지만리'는 비난 받아야 마땅하고 금지되어야 마땅한 노골적 친일유행가는 아니다. 어설픈 친일론의 엉뚱한 제물이었는지는 몰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