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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라이벌] 성삼문 vs 신숙주.

우쭈쭈장 2009. 7. 29. 12:01

-유교적 명분 추구 단종 복위 운동… 충신으로 평가- -강력한 군주관 따

라 세조 즉위 도와… 배신자 낙인-


조선 초기는 새로운 사회 건설에 필요한 여러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시기

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국가 운영의 기본틀로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에 피

지배층은 그런대로 개혁적 조처가 이뤄지고 있다고 여겼 다. 민중 반란

과 같은 큰 사건이 별로 없었던 게 그같은 사실을 방 증한다.

하지만 지배세력 내부의 권력 쟁탈전은 그칠 날이 없었다. 2차에 걸 친

왕자의 난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등이 잇따랐다. 세조의 즉위 에 대해

집현전 학사 대부분이 반대했으나 일부에선 용인하는 태도 를 보였다. 반

대 세력의 대표주자가 성삼문이라면, 신숙주는 수용론 의 선두주자였다.

성삼문은 1418년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무반이던 승(勝)의 아들

로 태어났다. 18세 때 생원시에 급제한 뒤 24세에 집현전 학사 로 뽑혀

박팽년·신숙주·하위지 등과 학문을 닦았다. 신숙주는 1417년 전라도 나

주 금안동(지금의 나주군 노안면)에서 태어나 22세 에 진사시에 장원으

로 급제하고 관직생활에 나섰다. 24세 때 도서 출판을 담당하던 주자소

별좌에 임명되면서 책과 더욱 가까워졌고 몇 개월 뒤 집현전 학사로 나갔

다.

세종은 성삼문과 신숙주를 매우 총애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두 사

람에게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13번이나 찾도록 했

다. 명나라 문장가 예겸과 사마순이 사신으로 오자 그들과 대적할 문장가

로 신숙주와 성삼문을 내보냈다. 만년에 신병 치료차 온천에 행차할 때

면 으레 성삼문을 비롯해 신숙주와 이개, 하위지 등이 뒤따르도록 했다.

세종의 관심 속에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을 계기로 각자 다른 길로 들어섰다.

성삼문은 처음에 수양대군을 돕다가 단종 복위운동에 나섰다. 정치 철학

에 따른 행동이다. 세종이 즉위 3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문종 이 뒤를

이었다. 병약했던 문종은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살의 세자 가 왕위를 이

었으니 그가 곧 비운의 주인공 단종이다. 생전에 문종 은 황보인·김종

서 등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남겼으나 집

현전 학사들과 김종서·황보인의 정치적 입장은 서로 달랐다. 집현전 학

사들은 왕과 직접 대면하며 학문을 토론할 수 있었지만 정치문제에 크게

관여할 수 없어 나름대로 불만을 지녔 다. 그들은 집현전을 떠나 출세가

보장되는 대간이나 정조로 자리를 옮기려 했으나 세종의 강경한 태도에

번번이 좌절됐다. 문종이 즉위 하며 집현전 학사들의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황보인 등이 실세로 떠올랐다. 집 현전

학사 출신들은 출세의 장애물을 만난 셈이다. 결국 그들은 왕 실의 권위

회복을 꿈꾸던 수양대군 편에 서는 바람에 정난공신(靖難功臣)과 좌익공

신(佐翼功臣) 명단에 대거 올랐다. 정난공신은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

이 김종서·황보인 등 당시 의정부 대신들을 제 거하고 난 뒤 책봉했는

데 문인 12명 가운데 8명이 집현전 학사 출신 이다. 성삼문을 비롯해 신

숙주와 박중손, 정인지·최항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좌익공신은 세조의

즉위를 도와준 인물들을 책봉한 것인 데 여기에도 집현전 학사 출신이 7

명이나 된다. 정난공신 8명 가운 데 박중손만 제외하고 모두가 좌익공신

에 다시 책봉됐다. 물론 여기 엔 집현전 학사들을 이용해 의정부 대신들

을 없애고 자신의 집권을 합리화시키려는 세조의 의도가 적잖게 작용했

다.

집현전 학사들도 자신들이 이용만 당할 것이란 불안감을 가졌다. 왕 권

강화를 꿈꾸는 세조 밑에서 그들의 입지가 결국 약화될 수밖에 없어서

다. 오히려 나이 어린 단종이 권한 강화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그

래서 들고 나온 게 유교적 명분과 선왕의 유지다. 소위 유교적 명분과 의

리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다. 성삼문을 필두로 박팽년과 이개, 하위

지 등 집현전 학사들은 무인이던 성승과 유응부, 김질, 그리고 단종의 외

숙 권자신 등과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결의하 고 기회를 엿봤다.

그 기회가 왔다. 1456년 6월 세조가 세자와 함께 명나라 사신을 창 덕궁

에서 맞기로 하자 성삼문 등은 성승·유응부로 하여금 별운검 (別雲劍 :

왕이 행차할 때 옆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무관)으로 나 서도록 조치한

뒤 신호에 따라 세조와 세자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거사를 눈치

챈 한명회가 “광연전(창덕궁 안에 있는 집)이 좁고 더우니 세자와 운검

을 들이는 건 그만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라고 건의하자 세조는 이를 받

아들였다. 거사가 불발로 끝나자 모의 누설을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 정창

손을 찾아가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거사 모의자는 모조리 체포됐다. 모진

고문 끝에 성삼문 등 거사 모 의자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삼문

은 당시 심정을 시로 읊었 다.


“울리는 저 북소리 운명을 재촉하는데/머리를 돌이키니 서산에 해 가 저

문다/황천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뒤편에서 어린 딸이 “아버지! 아버지!”를 울부

짖을 뿐이었다. 죽기 직전 하인이 바치는 술 한 잔을 들이키고 마지막으

로 시 한 수를 더 읊조렸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됐 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신숙주는 성삼문과 달리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세조

를 도와 거사 모의자들을 국문했다. 그가 성삼문과 뜻을 달리한 건 군주

관(君主觀)이 달라서다. 왕은 힘이 있어야 중심을 잡고 제대 로 정치를

펼 수 있다고 믿었기에 허약한 단종보다 야망과 힘이 있 는 세조가 군주

로서 더 적합하다고 믿었다.

개인적 인연도 크게 작용했다. 단종이 즉위한 해에 신숙주는 수양대 군

과 함께 북경에 다녀왔다. 그 전부터 수양대군과 잘 알고 지내던 터였으

나 북경 동행은 수양과 급격히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단종 은 자신의

즉위을 인정한 명나라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고명사 은사를 보내기

로 결정했다. 그때 수양대군이 사은사를 자청하고 나 섰다. 아마도 수양

은 사은사 역할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강

화되리라 믿은 듯하다.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명망이 높던 신숙주를 사은

사에 포함시킨 건 뒷날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포석으로 보인

다. 어쨌든 신숙주는 장장 4개월여에 걸친 대장정 끝에 수양대군의 인격

과 의지의 진면목을 보게 됐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귀국한 뒤 급격

히 가까워졌다.

비록 유교적 명분에서 벗어나 세조의 즉위를 도와줬지만 신숙주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57년 춘추관 감사로서 조선 역대의 사적을 적은 편년

체 역사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완성했으며, 세조 4년 우의정에 오

른 뒤에는 세조의 명을 받아 〈병정(兵政)〉이란 군사제 도에 관한 책도

지었다. 세조 5년엔 함길도 도체찰사로 나가 여진족 을 회유해 평화협정

을 맺었다. 성종 2년(1471)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 됐으나 여러 번에 걸

쳐 사직상소를 올려 후진들에게 길을 터줬고,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

다. 죽기 직전에 성종의 명을 받아 일본 의 지세와 국정, 사신 접대예절

등을 적은 〈해동제국기〉를 편찬하 는 여력을 보이기도 했다.

한데 신숙주는 영원한 배신자이고, 성삼문은 천추의 충신으로 평가 되고

있다. 유교적 관점이란 잣대를 들이대면 그같은 평가가 타당하 다. 하지

만 평가기준을 오로지 유교적 입장이나 지배자의 처지에 두 는 건 바람직

하지 않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총체적 위기라서 왕이 교체돼야 고달픈

삶을 영위하는 민중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조선이 건국된 지 60여 년이 지난 시기로 여러 면에서 정비 가 이

뤄지던 시점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문제는 선악의 입장에서 논 하기 어렵

다. 단지 신하의 입장에서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문제였다. 역사에 있어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단종이 왕위를 보존했다면 과연 세조보다 정치

를 더 잘했을까. 강한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출처 :♤끄적끄적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승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