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1881.10.25~1973.4.8)
'피카소'는 살아생전 스타였다. 고흐가 무명으로 사후에 유명해진 것과는 달리
그림을 그려 거부가 되었고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피카소'의 이름은 들어봤다할 정도로 유명했다.
"나에게 그림이란 파괴의 종합”이라고 했던 그는 특출난 감성과 욕망을 미술로 풀어냈던
현대 미술의 거장이다. 그는 분명 세기의 심장을 꿰뚫은 천재였고 통찰력 넘치는 광인이었으며
욕망에 충실한 현대판 돈환이자 20세기 최고의 권력을 지닌 예술가였다. 21c 신기루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나는 어린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준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만 살아있다.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나는 그 속을 가득 채울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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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의 이별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 시절부터 가난한 이들을 즐겨그렸다.
마드리드에서 그렸던 초기 작품중 하나다. 열아홉의 피카소는 화가가 되기 위해 예술의 도시 파리로 온다.
피카소의 작품은 철저히 자전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글로 자서전을 쓸 때 나는 그림으로 내 자서전을 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삶이 그림이되었고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은 그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 같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살아온 시기별로 구분을 확연하게 가지고 있으며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때부터 그림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던 사람이었으며
대부분 천재가 그렇듯 그는 괴팍하고 이기적이며 재기가 넘쳤고 어릴적 부터 재능을 키워준 사람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화가로서의 천재성을 알아주고 적절한 교육을 시켜준 아버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피카소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화가이자 미술학교 교사이자
지방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전통 아카데미 방식의 미술 수업 기초를 피카소에게 가르친다.
Le Gourmet,
1901,Chester Dale Collection

이 그림의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으로 그의 고독감이 두드러진다.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한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으로 권총자살을 했던 것이다.
친구의 자살과 가난과 병으로 화면에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에 침잠케 하고 있던 청색 시기의 그림이다.
피카소에게 초기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23살이 되며 그는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탁선이라 불리는 파리의 빈민굴에 정착했다.
세탁선은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가 머무는 집합소여서 그는 르느와르, 모딜리아니를 만나게도 되었고
또한 삼류가수,약장수,건달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무질서한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배와 과일 그릇
파리로 온 피카소는 그 곳의 모든 박물관을 빠짐없이 순례했고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앞에서 넋을 잃었으며
드가, 툴루즈 로트렉, 고갱, 반 고흐, 세잔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정열적인 탐색을 하였고
아프리카의 예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세잔의 정물화는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사실적인 그림보다는 자리를 바꿔가며 관찰하고 화면의 조화를 위해
일부러 어긋나게 그리는 그의 방법에 피카소 역시 깊은 매력을 느끼게된다.
이무렵 피카소는 조각가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혼자 세탁선에 살고있던 동갑내기 올리비에를 만나게된다.
그녀의 등장과 질병의 호전으로 불안과 초조는 가시고 자기 미술에 대해 점차 장밋빛 자신감을 얻는다.
피카소와 같이 살게 된 올리비에는 그를 위해 갈게는 며칠 동안 꼼짝 않고 모델을 서 주었다.
이때 피카소는 너무 가난해서 외출할 때 신을 제대로된 구두조차 없었지만 밥은 굶더라도
서커스 구경은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으며 광대나 여성곡마사와 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아비뇽의 처녀들 
새로운 형태의과감한 시도를 하기 위한 첫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만 809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는 사물을 여러번 보며 새로운 각도를 찾아내며 재창조해냈다.
그는 최대로 자유롭게 감정을 따라가며 그 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20세기 미술의 최고의 혁명은 바로 큐비즘이였다. '큐비즘'은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외면적인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완전히 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여
사물의 본래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변형을 가져오는 실험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기이다.
피카소는 이런 형태의 파괴를 즐겼고 사람들이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며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던졌고 피카소는 세계적인 화가의 위치에 올라가게 된다.
피카소는 대상을 잘게 쪼개어 해체하는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에도 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체주의는 이후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개념미술 등 현대미술의 모든 모험에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아비뇽의 아가씨를 세상에 내놓은지 2년만인 28세 때부터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깨달아 과감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작품은 사람들의 의심 섞인 눈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독일,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팔려나갔고 자신감이 붙은 피카소는 그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애인 에바에게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2년 31세의 피카소는 올리비에와 헤어지고 가냘픈 에바와 함께 살게된다.
그러나 몸이 약했던 에바는 결핵에 걸려버리게 되었고 피카소는 병이 감염될까봐 이사를 했다.
그는 문병을 올때마다 에바의 이웃에 살던 여인과 관계를 가졌으며 에바는 1차대전 이듬해 세상을 등지게 된다.
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올가는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발레리나로 당시 유부녀였지만 그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때 첫 아이를 낳아준 그녀는 그와 첫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알아보이게 그리길 원했고 이에따라 피카소는 신고전주위로 회귀한다.
그리하여 감상자의 입맛에 맞는 그림만 그리는 기회주의자라는 신랄한 비평을 듣기도 했지만
마흔을 갓 넘은 화가로써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며 그는 점차 거부가 되어갔다.
하지만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올가는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
집안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사치스런 생활이 계속되면 될수록 피카소는 속박과 외로움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낀 피카소는 이혼을 요구하게 되지만 올가는 이혼해주질 않았다.
피카소는 그녀에 대한 미움으로 그녀의 형체를 뭉뚱그린 댄서같은 그림들을 남겨놓게 된다.
자전적인 그림과 인물화를 많이 그린 피카소는 자신의 사귄 여인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연인이 바뀌면 그림의 성향도 완전히 다르게 바뀔 정도로 감정에 충실한 화가였다.
피카소는 92년의 생애 동안 수없이 많은 여자를 유혹했으며 빈번한 관계를 만들곤했는데
그중 함께 지낸 7명의 여자들은 그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작품 표현양식의 변화를 같이했다.
그에게 에로스는 모든 창조의 샘이었고 미적 감동과 성적 쾌감은 동일시 되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다보면 마치 그의 일상에 놓여있는 기분마져 든다.
그의 감정에 따라 대상의 위치와 크기, 형태가 원하는 대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마리 테레즈
마리 테레즈와 밀월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화려한 색채를 쓰기 시작한다.
젊은 여성이 발산하는 화사한 매력을 담은 작품이다.
1924년부터 불기 시작한 초현실주의는 피카소에게 격력한 분열과 결혼에 대한 환멸을 부채질했고
1927년 46세의 피카소는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우연히 길을 가다 보기 드문 그리스풍의 조각 미인인
17살이 채안된 마리 테레즈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던 것, 그는 단숨에 그녀를 쫒아 외쳐댔다.
"나는 피카소요, 당신과 나는 함께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외모와 천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피카소는 그녀에게 함께 작업을 할 것을 제한한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육개월내내 거절했지만
마리의 18번째 생일이자 성년식이였던 날 피카소는 올가와 살고 있는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비밀거처를 마련했고
피카소는 그녀에 대한 성적 환상을 주제로 조각, 그림, 판화를 통해
다른 어떤 여인들을 그린 것보다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게 된다.
"예술은 정숙하지 않은 것 Art is never chaste"이라는 피카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성, 욕망과 같은 주제가 그의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하나의 예술 작품은 파괴의 총체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인체의 비례나 위치를 무시한
왜곡은 그의 그림의 큰 특징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그린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아마 예술에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갓난아기처럼 거르지 않고 발산되는 원욕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제보다는 더, 내일보다는 덜 그대를 사랑해요. 그래를 영원히 사랑할거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마리 테레즈!"
그녀의 미모에 빠져 밀월을 가질땐 이렇게 속삭였던 피카소는 1935년 그녀가 딸 마야를 낳고 집착을 가지게되자
마냥 순종적인 그녀에게 질렸다며 도도하지 못해 품위가 없으며 무식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버렸다.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넘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으며 넘치는 재기를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피카소는 그의 고백대로 성욕에서 에너지를 찾은 화가였으며 여성의 그림을 유난히 그린 여성 탐험가였다.
그것은 어릴 적 어머니를 여윈 방황에 기인한 것으로 그는 시도한 탐험이 끝나면 다른 목적지를 찾아야 했으니
그는 이러한 여성에 대한 전착을 멈출 수가 없었고 그런 감정은 그림이 되어 화폭에서 끊임없이 녹아내렸다.
게르니카
'게르니카'는 역사적 배경을 담아 파시즘의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의 상징이 된다.
황소의 뿔에 찔려 죽어가는 마의 운명은 기병대의 세월의 종언을 뜻하며 눈부신 전구의 이미지는
화약과 대포가 보병보다 우위를 차지한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 것이며
어머니의 품에 안긴 죽은 어린 아이는 희생의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것이라 그는 지적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고 작은 도시 게르니카는 불바다에 휩싸이게 된다. 피카소는 고국의 이러한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다. 이무렵 피카소는 스페인어를 모국어마냥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며
시인들과 어울리는 지성적인 미녀 도라마알을 소개받게 되었고 그는 이 그림의 착상과 주제를 도라와 상의해나가며
함께 그림을 완성시켜 나갈 것을 제의하게 된다. 도라는 이에 피카소와 침식을 같이하며 '게르니카'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는 스페인 내전을 통해 반파시즘 인민전선 편에 서게 되었으며 전후 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피카소는 공산당 입당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가에 속하게 된다.
우는 여자
이 그림은 <게르니카>를 그리는데 도움을 준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를 그린 그림으로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분해한 뒤 재조립하여 그린것으로 그의 재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피카소에 대해 굴욕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우는 도라의 모습과 화가 난 피카소가 중첩되는 그림이다.
라캉이 "도라가 상징주의자들과 어울렸을땐 발랄하고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여자였는데
어찌하여 저 모양으로 문턱의 걸레마냥 불행한 여인이 되었는가"라고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던 그녀는 피카소에게 버려지자 정신착란에 이르게되어 자살하고 마는 불운의 여인이 된다.
유리의 파편처럼 깨진 얼굴은 피카소가 가진 그녀에 대한 미움을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닦는 손수건은
그녀의 울분과 분노를 알수 있게 한다. 피카소는 자신의 사생활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인 문제를 담은 작품이라곤 ‘게르니카’ 등 몇 편에 불과할 정도로 원하고 다투고 헤어지며 발산하는
여성에 대한 집착과 증오를 가진 남성적 신파가 그대로 그림에 묻어난다.
뭔가 씌우길 좋아하는 비평가들은 이 우는 여자 시리즈를 전쟁의 고통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지만
그보다는 우는 여자들에 대한 피카소의 짜증이 더 맞는 해석일 듯 싶다.
지중해의 풍경
내리쬐는 햇볕의 각도에 따라 같은 건물이라도 다른 모습을 그려내는 변화무쌍한 이 지방의 모습은
피카소에게도 다채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던 모양이다.
62세의 피카소는 자유분방하며 당당한 21살의 법대생 프랑수와즈 질로와 지중해의 바캉스를 즐겼다.
피카소의 첫아들인 파울로보다 나이가 어렸던 프랑스와즈는 그에게 정착하려고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고
10년을 함께 했으나 그녀의 친구 즈느비에브까지 건드는 바람기로 정신적 고통을 느끼자 더이상은 참을 수 없어
그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지금껏 자신을 버린 여성이 없었고 노년의 기쁨이었던 질로와 아이들을 잃는다는 사실에
피카소의 분노는 매우 컸다. 피카소는 그녀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그녀를 위협했지만
"그것이야말로 피카소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며 응수하며 그녀는 피카소의 그늘에서 빠져 나간다.
그녀는 가난한 피카소의 옛 애인들과는 다르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도 독립적이었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그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훗날 회고록을 썼으며
피카소와의 두아이를 입적시켜 그의 유산을 물러받도록 조치했다.
질로와 헤어진 며칠 후 70대의 피카소는 도자기와 도기로 유명한 발로리스시에 머무르며 도자기에 빠졌고
도자기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써 도자기 일을 함께 꾸리던 지중해풍의 여인 자켈린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61년 80세에 헌신적인 쟈클린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고령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자클린의 도움을 받으며 이전의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고전적 규율과 겨루기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모방하고 그 결과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젊은 날 극심한 가난에 처했지만 40세에 대단한 부자였으며 65세 이후 억만장자 화가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자필 사인을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작업을 해서페인팅 1885점,조각 1228점,
판화 1만8095점 등 5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 여인들에게서 창조적인 에너지를 얻었고
그 여인들은 자살을 하거나 대부분 불행하게 일생을 마쳐 일각에서는여인들의 영혼을 양식 삼아 창조한
뱀파이어라고 불린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평생을 통해 사랑해왔던 것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이기적인 화가 피카소, 피카소와 함께 여인들은 연인이자 아내이자 모델로서 그의 작품 열정을 자극했지만
그가 원할 때는 조용히 떠나야 했다. 다만 피카소의 여인들은 극장 좌석앉아 세기의 거장이 만들어 가는
창작의 무대를 구경만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 그의 연극에 동참하였던 것 뿐이다.
그는 끊임없는 열정과 샘솟는 실험 정신은 미술의 새로운 개념을 발굴하며 말년까지 계속되었고
19세기 미술의 마침표를 찍고 20세기를 열며 1978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예술 속에서 기발함과 독창성, 과장과 충격을 추구했다.
나는 내게 떠오른 수많은 익살과 기지로 비평가들을 만족시켰다.
그들이 나의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오늘날 명성뿐만 아니라 부(富)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면,
나는 나 스스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는 조토와 티치안, 렘브란트와 고야 같은 화가들이다. 나는 단지...
나의 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 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 피카소 -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라 텃세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주류에 들어서는 것, 그것이 명성을 얻는 길이다.
대부분의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요절을 하거나 소진되는 반면 그는90세를 넘기며
끊임없는 생명력을 자랑했고 막강한 예술적 권력을 쌓아갈 수 있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기존 통념을 깨는 극단의 단순함과 더불어
그가 가진 권력은 여전히 사람들이 피카소를 편애하게 만드는 주 원동력이 아니던가...
예술에서 객관적 구분은 없다. 예술의 힘은 그 이론적 사유와 권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피카소는 감동을 끌어내려는 욕망과 어두운 곳에 색, 형태, 이미지, 상징으로
자신에게 빛을 비추고 싶어하는 생의 욕망이 단단하게 자리잡은 사람이었다.
피카소는 자신의 창조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같은 끓어넘치는 생명력과 욕망을 피카소의 그림에서 발견하며 감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