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셉수트는 이집트 역사상 인기를 누린 스타 중 한명이다.
‘하트셉수트’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낯설 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는 정말로 신비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하트셉수트라는 여인은 공상가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 야심에 불타는 여인, 바람둥이 여인 따위의 소설같은 인물로 태어났다. 그밖에도 연약한 투트모스 3세를 괴롭히다가 결국은 증오에 불타는 파라오한테서 박해를 받는 권모술수에 능한 여인,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궁정의 반대파 고관들을 제거한 여인으로도 알려졌다. 어쩌면 그녀는 끔찍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일으킨 왕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집트가 하트셉수트에 내린 평가는 전혀 다르다.

- 투트모세의 가계
아메스 네페르티티 왕비는 투트모세 1세(1524~1518)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이렇게 해서 투사인 달의 신‘이아’에서 또 다른 달의 신 ‘토트’로 넘어오게 되었다. 태양인 라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던 토트는 네명의 투트모세 즉 ‘토트한테서 태어난 자들’의 이름을 짓는 작업에 들어갔다. 하트셉수트의 아버지는 투트모세 1세였다고 한다. 그는 아시아의 전투에 앞장섰는데 이는 틀림없이 델타를 장악하려는 폭도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어쩄든 평화시대였다.
뛰어난 건축가 이네니의 놀라운 솜씨로 투트모세 1세는 이때를 이용하여 보잘것없었던 카르낙 신전을 확장했다. 카르낙은 점차 거대하고 성스런 도시가 되어 아문 신 외에 다른 신들의 성소들을 받아들였던 곳이기도 하다. 투트모세 1세는 야만스런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두 땅을 통일하는 데 주역을 맡았던 테베를 고대의 멤피스와 같은 규모로 발전시킨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
투트모세 1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다섯 혹은 스무살의 아가씨.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2세의 왕비가 되었다. 투트모세 2세 의 통치에 관한 내용은 수수께끼로 남아서 역사가들에 따라 그의 재위기간을 3년에서 14년까지 다양하게 추정하고 있다. 투트모세 2세의 두를 이어 ‘토트의 아들’가계의 후계자인 소년 투트모세 3세가 등장했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투트모세 2세와 후궁사이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으나, 하렘에 현혹된 오스만인들의 환상이 종종 왜곡된 방식으로 고대 이집트에 적응되었던 같다..투트모세 2세가 죽었을 때 파라오로 지명된 투트모세 3세는 열살도 채 안되는 어린이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 왕국의 섭정, 하트셉수트
이집트는 관례에 따라 왕비에게 섭정을 요청했고, 자연스럽게 하트셉수트가 섭정을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돌아가신 두 땅의 파라오 자리에 오른 그의 아들 은 자신의 생명을 잉태시킨 자의 왕좌를 차지했다.한편 그의 누이이자 ‘ 신의 아내’인 하트셉수트는 나랏일을 돌보왔으며 두땅을 통치했다. 그녀는 권위를 인정받았고 나일 계곡은 그녀의 발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 하트셉수트 왕비의 무덤
섭정을 맡은 하트셉수트는 자신의 영원한 거처를 독특한 지형에 마련했다. 이 곳은 접근하기 어려운 와디(물이 없다가 비가 오면 물이 흐르는 골짜기)이자 비좁은 통로로 연결되는 절벽이어서 일단 입구를 막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의 무덤 안에는 ‘모든 나라의 지배자, 왕의 딸, 왕의 누이, 신의 아내, 왕비, 두땅의 주인’이라는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새겨진 석관이 있다. 그녀는 하늘의 여신 누트에게 자기와 교감을 나누고 불멸의 별들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하나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던 여인이다.
- 하트셉수트의 얼굴
본래 이집트의 파라오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인물이므로 성스럽게 조각된 얼굴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살구 씨처럼 찢어진 눈, 길고 좁게 오똑 솟은코, 납짝한 뺨, 작은 입, 얇은 입술, 작은 턱, 이것이 그녀의 초상화였다고 한다.그것은 권력의 힘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전형적인 여성미를 보여주은 하트셉수트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 신탁에 따라 왕비는 파라오가 되다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 겨울의 두 번째 달 29일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룩소르의 신전의 넓은 뜰에서 거행되었던 아문 신의 신탁은 하트셉수트가 장차 나라를 다스리게 되리라는 것을 약속해 주었던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행렬속에 있던 신의 입상이 왕비 앞에서 기울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신관이 신의 뜻을 소리 높여 알리지 않았고, 더욱 더모호한 점은 하트셉수트가 신탁을 받은 바로 그 날짜에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보다 5년뒤인 투트모세 3세 7년이 되어서야 섭정을 맡았다
- 파라오 하트셉수트의 새로운 탄생
파라오의 몸안에는 유한한 운명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영원불명의 상징적 인간이 공존했다. 덧없이 죽어간 개인의 기록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지만 불멸의 인간에 관해서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내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른 지 7년쨰 되던 해에 파라오가 된 하트셉수트는 왕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를 갖는 탄생으로서 인간이 아닌 신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야 새로운 파라오의 능력을 신들이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므로
- 파라오 하트셉수트의 대관식
데이르 엘 바하리 신전의 저부조에는 하트셉수트의 대관식 직후에 여성 파라오가 탄생했으며 투트모세3세 2년에 있었던 아문의 신탁은 투트모세 3세 7년에 현실화되었다고 적혀있다.파라오 자리에 오른 의식은 아마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헬리오 폴리스에서 거행되었을 것이다. 이곳은 하트셉수트가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한몸에 지닌 창조자, 아툼에게서 합법적인 파라오로 인정받은 곳이었다.
- 남성이자 여성인 하트셉수트
왕실 대부인의 자격으로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한 적이 있었던 하트셉수트는 파라오가 된 뒤 다시 왕실 부부를 이루어야 했으나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모든 남성 파라오들이 의식에 맞춰 왕비와 함꼐 통치한 것과는 달리 여성파라오들은 독신으로 지냈다. 여성파라오들은 왕이 됨으로써 남성의 자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들 자신의 아내이자 남편이 되었고, 결국 그녀들은 한 몸 안에 왕과 왕비를 함께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 충실한 두명의 대신, 하푸세넵과 세넨무트
하푸세넵은 하트셉수트의 재임 초기에 경제 분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테베의 여러 공사장들을 감독했던 자이다. 그는 수많은 기술자들을 이끌고 왕들의 계곡에 여성 파라오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했다.
세넨무트는 여러 작품에서 그를 하트셉수트의 정부이자 그녀의 딸 네페루레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 어느 쪽이 맞는 지 모르지만 하트셉수트는 그를 딸 네페루레의 선생이자 ‘양부’로 삼았다고 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세넨무트의 모습은 여러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세넨무트가 하트셉수트의 신망이 두터웠던 심복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누렸던 특권은 대단했다. 그것은 두 개의 무덤, 규암으로 만든 화려한 석관, 수많은 석상들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된다. 세넨무트의 모습이 데이르 엘 바하리 신전 내부까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 세넨무트는 카르낙, 룩소르, 헤르몬티에서 공사를 지휘했으나, 그가 누렸던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은 ‘극치 중의 극치’인 데이르 엘 바하리 신전을 담당했던 일이었다.그보다 더 중용한 것은 왜 세넨무트에게 두 개의 무덤이 주어졌는가 하는 것인데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한다.
- 대역사를 이끈 정책
파라오의 으뜸가는 임무 중 하나는 신의 거처인 신전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신전은 신들이 지상에 거주할 수 있고 인간 사회의 정신적, 사화적 번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테베, 헤르몬티스, 콤 옴보, 엘 캅, 쿠새, 헤르모폴리스, 토트의 성지 등 여러 곳에 정성을 쏟았다.
- 사자 여신의 성소와 악과 맞선 투쟁
하트셉수트가 각별히 정성을 기울였던 곳은 중부 이집트의 베니 하산에 가까운 곳으로,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라는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파크헤트라는 사자여신에게 바친 조그만 성소가 암석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전설에 따르면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는 야만스럽고 속된 정복자 힉소스인들에 의해 파괴돠었다고 한다. 사자여신 파크헤트는 자신의 위험스러운 기운을 잘 다스리고, 광명을 위해 봉사할 땐 동쪽 사막의 무서운 악마들을 수호 정령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신성한 기운이 충만한 자신의 성소에서, 하트셉수트는 나라를 위해 이 거룩한 주술을 행사했다. 이것은 파괴의 기운들을 정확히 가려낸 뒤, 이 기운들을 건설적으로 바꿔놓는 작업이었다. 만약 사자여신 파크헤트를 의식을 통해 잘 구슬리지 못한다면, 이 지방에 폭우가 쏟아지고, 격류를 이루어 진흙과 자갈들을 휘몰아가면서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이며, 인간 마음속에 있는 음흉한 열정은 증오와 폭력과 탐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갖고 하트셉수트는 사자 여신의 신전을 복원하고 의식을 살리고 ‘제물의 유통’을 보장했다.

- 하트셉수트의 영원한 신전 데이르 엘 바하리
파라오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8년부터 하트셉수트는 테베 서안에 있는 데이르 엘 바하르 신전 건축이라는 대역사에 착수했다. 이곳은 테베 서안의 산꼭대기이자 ‘침묵의 여신’의 거처였다. 부분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은 이 자연적인 피라미드는 왕들의 계곡과 욍비들의 계곡을 굽어보고 있다. 데이르 엘 바하리는 하트셉수트의 ‘수백만 년의 신전’으로서 그녀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의 ‘카’와 합쳐진 하트셉수트의 ‘카’에 의식을 바차는 장소이자 숨어 있는 신 아문과 신성한 사랑의 여신 하토르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들 신들의 보호를 받는 하트셉수트의 영혼은 이곳에서 영원히 소생한다고 한다.
- 대외 정책
하트셉수트가 군림했던 기간만큼 이집트가 평화로웠던 적도 없었다. 재임 초기에 그녀는 누비아에 개입했던 것 같으나, 이는 소란을 일으켰던 부족에 대한 진압책이었으며, 이집트는 평온을 곧 되찾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숙적인 리비아와 시리아에 대한 승리를 거둔 우두머리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모습이 독수리의 형태로 그려져 있는 이유도 그녀가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아홉 명의 적들을 평정햇기 때문이다. 누비아나 리비아, 아시아, 베두인계의 적들은 그녀에게 순순히 복종했다고 한다. 따라서 하트셉수트의 대외정책은 말과 의식을 통해 적의 세력들을 회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기록에는 하트셉수트가 그녀의 아버지 아문과 맺었던 친밀한 관계가 강조되어 있다. 아문은 여러 번 하트셉수트앞에 나타나 그녀가 지켜야 할 몸가짐을 일러주었다. 이와 같은 신의 말씀은 인간의 생명 한 가운데, 의식의 심장부에 곧장 전달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린 하트셉수트는 여러개의 오벨리스크를 세움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은 실제 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가 했던 행동을 그녀가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오벨리스크는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쁜 기운들을 멀리 떨쳐보냄으로써 신전을 보호하고, 창조의 빛을 신전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벨리스크의 건립은 태초에 창조의 초석이 되었던 최초의 돌을 되살려내는 일이기도 했다.
-불확실한 말년
21년에 들어서면 하트셉수트의 이름은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투트모세 3세는 파라오 하트셉수트의 재임기간 중에도 끊기지 않았던 자신의 연호 22년에 혼자 나라를 다스린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이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반증이지만 그녀의 죽음에 관한 자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이집트에서 흔한 일이다. 파라오의 탄생이나 죽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며, 있다 해도 그것은 아주 상징적으로 전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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