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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은 몇 살이나 독살 당했을까?

우쭈쭈장 2009. 7. 29. 11:55

 

 

 

조선의 왕들 중에서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는 임금이 여럿있다. 우선 정조 독살설은

 

소수설에서 다수설로 바뀌고 있고 선조, 효종, 현종, 경종 등이 있고 세자로는

 

소현세자 독살설 등 권력의 중심부에 독살설이 유난히 많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 왕조에서 유난히 국왕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우선 왕권과 신권의 균형문제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란 국가의 정치 권력 구조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시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라이프 사이클 또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왕권과 신권 관계는 다소의 굴곡이 있었지만 대체로

신권이 왕권에 비해 우월한 시기가 보다 많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조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이었을

뿐 실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숭배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도 많

았다. 태종대에 출발해서 연산군대에 절정을 이룬 왕권은 그 이후로는 줄곧

 

왕권이 신권에 앞도 당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는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 반정 이후 왕권의 발원이 반정을 성공시킨

반정 공신들의 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 왕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의도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위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 권력 구조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위계 질서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간 매개체로 붕당이란

변수가 중기 이후 개입되어 붕당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서 국왕의 의사에

배치되는 행동도 하게 된다. 실제로 국왕의 관리 임명권이나 정책 결정권

에는 신하들의 견제 수단이 상존하고 있어서 국왕의 일방적인 집행은 매

우 어려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의 국왕은 의중의 인물을 정승으로

임명하기 위해 신하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전지 전능하기는커녕 전지 한 장을 쓰기 위해서 신하들을 위협하고 달래

야 했던 나약한 존재였다. 왕조국가 조선에서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조선에서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론이다. 즉 임금의 신하이기보다는 소속당의 당인인

 

신하들임을 보다 중요시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라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서

 

신하들은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따랐다. 이런 증거를 보면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는데, 독살설의 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는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

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擇君)'

 

이라 하는데, 국왕 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이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것이다.

 

왕을 갈아치우는 것을 반정(反正)이라 한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造)로 돌아가다"라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 데 비해 독살은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왕조의 힘이 다한

 

왕을 사대부 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규합하여 그들의 정치세계를

유지해나갔던 것이다. 당쟁이 치열하던 시절 조선의 왕권이 약하다는 사

실은 외국인의 눈에도 감지되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청나라 예부시랑 오합이 했다는 말을 듣고 분통을 터뜨

린 일도 있었다 오합이 청 황제 성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만약 우리 조정에서 보호하지 않는다면

몇 번이나 왕위 찬탈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여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이처럼 방자하기 때문에 청나라사

람들이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고 말하지 않느냐."라며 분노

했다라고 한다.

그리고 거시적으로 조선이란 국가의 라이프 사이클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정확한 분류는 아니지만 동 서양을 막론하고 국가는 대체로 2백-3백여 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다. 왕조의 존속 기간이 중요한 것은,왕조나

 

국가의 생명 싸이클이 비슷한 경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국가나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싸이클을 지닌다.

싸이클의 각 과정은 상황에 따라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만약 발전기가 길다면

 

그 왕조의 국력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다.

 

발전기가 끝나면 정체기 또는 쇠퇴기라는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왕조나

국가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쇠퇴기. 멸망기

에 접어든 이후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였다. 이런 기록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지배 계급인 사대부들이 피지배 계급인 농민들 위에

 

군림했던 조선의 사회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이란 국가는 국가의 기본 기능이

상실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괴리는 점차 커져만 갔으며 지배층은 국민

을 위한 정치보다는 자신의 당리당략만을 위해서 정치 행위를 영위해갔으며

 

이미 국민들의 마음은 조선을 떠나 있었다.

급기야 일본이 침략했을 때 지배층들이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 조선의

 

백성들은 전란의 모든 피해와 복구, 의병 활동등을 독자적으로 수행해

 

나가서 왜란을 수습해나갔으나 조선 정부는 전란이 끝난 후에도 당파

싸음을 일삼으면서 백성들의 영웅이된 의병장들에게 역모 혐의를 씌어 죽

이기에 급급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선의 지배 구조는 붕괴되어야 마땅

하고 새로운 현태의 정치 체제가 탄생되어야만 마땅한 상황이었다. 이처

럼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들이 다스리는 조선의 국가통치 체제는 임진왜

란으로 종말을 맞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

가 없었다. 조선은 이때 이미 생명 싸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

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대부들은 무려 3백 년이란 세월을 군림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생명의 연장이었다. 정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

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조

선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국왕 독살

설'도 그 하나이다. 국왕 독살설의 객체인 임금들이 대부분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6세기 말부터 대체로 나타난다. 조선 전기의 임금인 예종을 제

외하고는 독살설의 대상인 선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 경종, 정조 등

의 임금들이 대부분 이시대 사람들이다. 조선의 국왕 중 독살설에 휘말

린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9명이나 된다. 여기에 일각에

서 주장하는 예종까지 포함시키면 우려 10명이나 되는 셈이다. 2명의 세

자를 제외하더라도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 비정상

적인 정치 체제였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27명의 임금 충 무려 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

이란 정치 체제에 데해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

다. 이는 단순히 '조선'이란 과거의 왕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점에 착안하여 우리얼에서는 독살

설에 휘말린 임금들의 행적과 그 진상을 규명해 보고 그 당시의 정치상황

을 분석하여 올바른 정치문화를 현 시대에 맞춰 재조명하는 작업을 앞으

로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출처 :♤끄적끄적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승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