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망국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어느 모로도 미화될 수 없는 인물이 다.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공화정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는 절대 군주 시대 의 흥륭(興隆)이나 망국은 결국 그 시대 최고 지배자인 군주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고염무의 말처럼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 다' 인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일이며 결국은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이야말로 흥망의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이나 경순왕이나 공양왕이나 순종황제 모두가 역사에 책임이 무거운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역사의 문책이나 문죄가 정도를 지나치는 것은 그 책임을 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온당한 필법이라고 볼 수 없다. 의자왕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우선 3천 궁녀 얘기만 해도 역사적으로 입증 되지 않는다.
백제가 멸망한 당시의 총 호구수는 76만 호였으며 총인구는 620만 명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들이 백마강에 투신 자살한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날 궁녀들이 왕포암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이곳이 타사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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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고려 시대에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이 부여를 돌아보고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
시를 짓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오존오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
이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며 고려 시대에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백성들의 과음이 심해지자 세종대왕께서 '신라가 망한 것이 포석정의 술판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이 모두 술 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라' 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말은 흔히 알려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후에 '동국여지승람' 에 이곳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낙화암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투신 자살했던 궁녀들의 숫자는 3천명이라고 할수는 없다.
* 근거 1 -"3천 궁녀란 공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가 살았으니 인구는 4만 5천 명 정도였으며, 2천 500명의 군대가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구 4만 5000명에 군대는 2천 500명이었던 도성에서 3천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생산력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과연 가능했을까? 이는 인구 비례로 볼 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부여의 인구가 9만 5000명인데 지금의 도시 기능으로써도 궁녀 3천을 거느리기 어려 운 것이다. 부여 어디에 3천명을 수용할 만한 주거공간이 과연 있었을까? 그렇다면 '3천궁녀' 라는 말은 누가 제일 먼저 했을까? 어떠한 1차 사료로써도 궁녀가 3천 명이었고 그들이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 이 입증되지 않는다.
안정복의 기록에 따르면 '여러 비빈들' 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내가 과문한 탓이라고는 생각되지만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 했다는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 이었다. 3천 궁녀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마도 이홍직이 쓴 '국사대사전' 의 '낙화암' 조항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첫 발설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3천 궁녀 얘기는 여염에서 흔히 들어오던 것이었다.
그는 참고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적어놓았으나 그 책에는 그런 이야기가 한 구절도 없으니 정확하다 할 수 없다.
*근거 2 - "망국의 임금이었던 의자왕에 대한 역사가들의 비난"
이런 얘기와 함께 의자왕의 평소의 공적이나 행실을 비교해 보노라면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낀다. 그는 무왕의 아들로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여 해동 증자의 칭호를 들었다. 증자는 공자께서 가장 아끼시던 제자였다. 의자왕 집권 초기에는 국력이 부강하여 신라를 제압했고, 성충, 홍수, 계백과 같은 충신들과 장군들이 조정에 포섭되어 있어 선정을 베풀었다.
다만 자식의 죽음으로 한껏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와 시대의 명장인 김유신의 음모로 이뤄진 나당 연합군의 정복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결국 재위 20년 만인 서기 660년에 그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해에 죽어 중국의 망산 에 매장되었다.
요컨대 의자왕과 낙화암에 관한 역사는 허구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일차 사료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신라 중심사로 삼국시대를 기록하려 했던 일제 친일사학자들이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 했고, 궁년 3천명을 데리고 살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곡필했으며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자료로써 그를 인신 공격했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도 이 나라 역사의 한 원혼이 되어 지금도 구천을 헤메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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